언제 : 2015.12.30
어디 : 일제강제동원역사관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대일항쟁기 강제동원의 진상규명 및 피해조사 과정에서
군인, 군무원, 노무자, 일본군‘위안부’ 등 강제동원되었던 피해자들로부터 기증받은
강제동원 관련 각종 박물자료, 기록물, 영상물 등을 전시한 곳으로
우리 과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책임을 밝혀 한·일 양국민 상호간 이해의 폭을 넓히고
나아가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교육과 연구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역사관을 부산에 건립한 배경
부산항은 국외로 가는 강제동원의 주요 출발지였고, 해방 이후 국외동원 피해자들의
귀환선이 가장먼저 도착한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음.
- 팜프렛에 의함 -
일제강제동원역사관. 부산시 남구 대연동. 2015.12.10개관. 건물면적 12,060㎥(3,654평)
상설전시실 (4층, 5층)은 전시 중. 기획전시실은 현재 준비 중.
만약 이 사진이 1940년에 찍은 것이라고 가정하면 사진 속의 어린이들이 지금 쯤 80세 쯤 ---,
기억의 터널. "여기 저기서 죽은 사람은 많았는데 우리나라를 빼겼기 때문에 초상치는 것은 한 번도 못밨어 ---"
군인수첩, 국민노무수장 등 당시 신분증인 듯.
군인동원. 입영시 마을에서는 장행회(壯行會)를 열어 전장으로 끌려가는 청년들의 억지 전송식을 ---.
일제강제동원. 조선인 강제동원 총 7,827,355명. 노무동원 7,554,764명. 군무원동원 63,312명. 군인동원 209,279명.
'일본군 위안부'란?
"일본군 위안부는 일제가 1931년 만주침략 이후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설치한
위안소에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말한다. ----
피해자 규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학계에서는 최소 3만에서 최대 40만명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
한반도 내 노무동원 자료, 기록 등
중국관내로 동원된 조선인 군인. 조선인의 만주 개척과 노무동원.
전범이 된 사람들. "--- 전범으로 처벌된 조선인 중 사형을 당한 조선인은 모수 23명이었으며, 그 중 포로감시원은 14명 이었다."
일제에 강제동원되어 먼 이국 땅에서 죽어 한 줌 흙이 되어버린 ---.
강제동원된 흔적들
내선일체사상보국.
"죽을지 살지 모르는 길을 떠나는데,,, 발길이 안 떨어져."
조선인 노무자숙소. 구타와 학대 ---.
막장에서 12시간 작업, 다리가 잘리고 손이 잘리고 --- 부상자가 속출하고 ---.
좁은 곳에 누워 채탄작업.
해외로 끌려가 노예처럼 ---.
위안소.
해방과 귀한. "일본의 패전소식을 전해들은 조선인은 귀환을 서둘렀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귀환은 일본의 몫이었으나, 일본은 방관하였고 귀환을 도와야 할 조국도 무정부상태였다.
스스로 귀환길을 나서다가 폭풍과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기도 하였다.
동료의 유해를 끌어 안고 고향으로 오는 길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안타까운 여정이었다."
예상외로 젊은이나 대학생 관람객들이 많다. 손녀와 함께 온 듯, 한 할머니가 지팡이를 집고 전시실로 가고 있다.(왼쪽)
하시마 군함도의 진실. "한인들 불구돼야 나왔던 지옥섬. 세계유산 日 시설에 한인 6만명 강제징용. ---."
관람 후 전시실 4층 입구에서 본 황령산과 금련산. 멀리 오른쪽에 장산.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는 국민은 그 역사를 되풀이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팜프렛에 의함--